
1. 최익현: 족보가 주먹보다 강한 세계
1982년 부산 세관 공무원이었던 최익현은 밀수꾼들의 뇌물을 받으며 생계를 이어가던 평범한(?) 비리 공무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세관 내부 비리가 검찰 수사에 오르자, 부양가족이 가장 적다는 이유로 홀로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공직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여기서 OME(Organizational Misbehavior and Ethics, 조직 내 부정행위와 윤리) 위반 사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요. 쉽게 말해 조직 내에서 힘없는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전형적인 '총대 메우기' 구조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과연 나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봤습니다. 같이 비리를 저질렀던 동료들은 멀쩡히 자리를 지키는데, 나만 희생양이 되는 상황이라면요. 최익현이 그날 밤 우연히 마약 밀수 현장을 목격하고 일본 야쿠자와 연결된 조직 보스 최형배에게 그 물건을 넘기기로 결심한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흥미로운 건 최익현이 폭력이 아닌 '경주 최씨 충렬공파'라는 족보를 무기로 조폭 세계에 발을 들였다는 점입니다. 형배와의 첫 만남에서 "근데 형, 실지 어니까 경주 갑입니다"라며 집안 항렬을 따지는 장면은, 한국 사회에서 혈연과 학연이 얼마나 강력한 자본인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순간이었죠(출처: 영화진흥위원회).
2. 인맥: 법보다 빠른 전화 한 통
"느그 서장 남천동 실제? 내가 인마, 느그 서장이랑 마! 어제도 같이 밥 먹고!"
영화에서 최익현이 유치장에서 경찰을 압박하는 이 대사는, 제가 본 조폭 영화 중 가장 소름 돋는 장면으로 꼽힙니다. 화려한 액션 신보다 '인맥 한 줄'이 더 무섭다는 걸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여주거든요.
실제로 최익현은 폭력 조직원이면서도 검사, 경찰, 정치인과 두루 인맥을 쌓으며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었습니다. 이를 사회학에서는 '사회자본(Social Capital)'이라고 부르는데요. 여기서 사회자본이란 개인이 사회적 관계망을 통해 얻는 유·무형의 자원을 의미합니다. 최익현은 족보, 뇌물, 협박을 총동원해 이 사회자본을 극대화했죠.
솔직히 제 경험상, 사회에 나가보니 '누구를 아느냐'가 실력만큼이나 중요한 순간들이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 속 최익현처럼 그 관계를 '거래'로만 활용하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이게 건강한 인맥 활용인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특히 형배를 불구속 처리하기 위해 부장검사에게 뇌물을 먹이는 장면은, 1980년대 한국 사회의 부패 구조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당시 검찰 비리 실태를 다룬 국회 국정감사 자료를 보면, 1980년대 초중반 검찰 내 금품 수수 사건이 빈번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출처: 국회도서관).
이 대목에서 최익현의 전략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족보와 학연을 활용한 초기 인맥 구축
- 뇌물을 통한 검찰·경찰 라인 확보
- 협박과 회유를 병행한 조직 확장
3. 배신: 배신의 연쇄반응, 끝은 어디인가
"우리 둘이 하나의 몸이 돼야 된다"던 형배와 최익현의 관계는, 결국 서로를 배신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형배는 부하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최익현을 의심했고, 최익현은 형배가 자신을 먼저 정리하려 한다고 판단해 검찰과 손을 잡았죠.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친구라면 무조건 믿어야지"라는 순수한 마음이 컸습니다. 하지만 영화 속 인물들이 상황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는 걸 보며, '절대적인 내 편은 없을 수도 있다'는 차가운 진실을 마주한 느낌이었습니다.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지금 내 곁에 있는, 계산 없이 나를 대해주는 사람들에게 더 잘해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되었고요.
형배가 최익현을 제거하려다 오히려 검찰에 체포되는 결말은, '범죄 조직 내 신뢰(Trust within Criminal Organizations)'라는 개념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쉽게 말해 불법적 이익을 추구하는 관계에서는 언제든 배신이 일어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조직범죄 연구에 따르면, 폭력 조직 내부의 배신 비율은 합법 조직보다 3배 이상 높다고 합니다.
최익현이 끝내 형배를 배신하고 살아남은 건, 어떤 면에서는 '생존 본능의 승리'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 마지막 장면, 손자의 돌잔치에서 누군가에게 "대부님"이라 불리는 그의 표정은 결코 행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배신으로 얻은 자리는 결국 또 다른 배신을 낳을 뿐이니까요.
'범죄와의 전쟁'은 단순한 조폭 액션 영화가 아니라, 1980년대 한국 사회의 부패와 인맥 구조를 적나라하게 폭로한 작품입니다. 주먹보다 족보가, 실력보다 연줄이 더 중요했던 그 시절의 민낯을 보여주죠. 저는 이 영화를 보며 '과연 지금은 달라졌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었습니다. 인맥이 여전히 중요한 사회에서,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요? 최소한 최익현처럼 관계를 거래의 도구로만 여기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는 것. 그게 배신의 연쇄를 끊는 첫걸음이 아닐까 합니다.